일반적으로 아담 스미스라고 하면, ‘국부론’의 저자로서 자유주의 경제학의 시초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아담스미스는 경제학자이기 전에 저명한 윤리학자였으며, 그가 첫번째로 출판한 책은 경제학과는 동떨어진 ‘도덕감정론’이다. 사실 난 경제학 전공자 (어디가서 창피해서 말 잘 안한다)임에도 불구하고, 아담스미스나 마르크스 등 정치경제, 경제역사 등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서 잘 몰랐는데, 아담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이 타인과의 공감이라는 문제를 다룬다는 것을 듣고 흥미가 생겼다.
사실 아담 스미스는 ‘행복한 삶’을 영위하는 법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행복한 삶, 좋은 삶을 향유 하기 위해서는 여러가지 요건이 필요한데, 그 중 하나가 물질적 풍요이며, 이후 집필한 ‘국부론’ 역시 좋은 삶을 살기 위한 필수 요건 중 하나인 ‘물질적 풍요’가 어떻게 창출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문명의 진보를 이끌어 왔는가를 제시한 것이라고 한다.

다시 도덕감정론으로 돌아가서, 도덕감정론에서는 윤리도덕적으로 살기 위한 많은 이야기들을 던지는데 전체를 관통하는 근본적인 질문은 이거다.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인데 어떻게 도덕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가? 그걸 설명하기 위해 엄청난 페이지를 할애해서 쓰고 있지만, 결국 인간의 마음안에는 공명정대한 관찰자(impartial spectator)가 있어, 그가 이기심을 조절할 수 있게 해준다고 한다. 여기까지 보면 읭?? 할 수도 있지만, 공명정대한 관찰자는 그냥 뿅 하고 튀어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타인을 공감(sympathy)하는 능력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이 부자를 부러워하고, 가난함을 부끄러워하면서 두려워하는 까닭은 공감을 통해 상대방의 상황을 상상하여 느끼는데 있다. 아무리 내가 훌륭한 업적을 이루더라도 아무도 몰라준다면? 그렇게까지 행복하지 않다. 아무리 내가 잘못을 저지르고 실패를 경험해도 아무도 모른다면, 나는 창피하지 않다. 이런 기분이 드는 것은 상상을 통해 타인의 상황을 공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공감이 확대되면서 공명정대한 관찰자가 영혼에 심어지면서, 부적절한 행위들을 제어한다. 길에 가다가 쓰레기를 주웠는데, 아무도 모른다고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내 안의 관찰자가 칭찬과 격려를 해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아담 스미스가 주장했던 자유로운 개인의 이익추구, 시장 체제에 맡기고 정부는 ‘보이지 않는 손’으로 행동하는 것은 한계없는 탐욕이 아니라, 모두가 가지고 있는 영혼의 관찰자라는 브레이크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흐어…

하지만 최근 벌어졌던 시국을 보면 모두가 공명정대한 관찰자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아니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소리를 무시하고 있을 수도 있고...


,